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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철학

공리주의와 직감주의: 윤리적 판단에 대한 두 관점

by 청파란 2025. 4. 27.

 

공리주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등장한 윤리 사상으로,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 이론은 인간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할 때 결과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공리주의자들은 ‘최고의 선’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가능한 한 큰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한 행위가 가져온 결과가 다수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제공했는지를 기준으로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실용성과 명확성을 지향하는 이론이다. 윤리적 갈등 상황에서도 공리주의는 일정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가령, 양자택일이 필요한 복잡한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어떤 선택이 더 많은 이들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올 것인가?"라는 기준을 통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실패했을 경우,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성공이라는 긍정적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그것이 곧 평가의 전부가 된다. 따라서 개인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성과를 내야 하며, 결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실용적 태도를 요구받는다.

하지만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오해하거나 극단적으로 적용할 경우,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가 이후 수십 년 동안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 헌신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의 과거 범죄는 봉사로 상쇄될 수 있을까? 공리주의를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면, 어떤 이익이 더 크냐에 따라 과거의 중대한 도덕적 과오도 덮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를 낳는다.

이런 한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직감주의이다. 직감주의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도덕적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별다른 철학적 추론이나 복잡한 이론적 검토 없이도 우리는 어떤 행동이 옳은지,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는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복잡한 윤리 이론을 적용하기보다는 직감에 따라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 심지어 철학자들조차도, 일상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이 직감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앞서 든 공리주의의 극단적 예시를 다시 생각해 보자. 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봉사활동으로 보상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우리는 머리로 논리적 계산을 하기 전에 즉각적으로 그것이 부당하고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이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도덕 원칙을 따르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직감적으로 이 결과가 부도덕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직감주의에도 약점이 있다. 우리는 직감주의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동시에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기에도 어려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무엇이 본래의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직감인지, 무엇이 사회와 문화적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주입된 직감인지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에 따라, 시대에 따라, 심지어 개인의 성장 환경에 따라 도덕적 직감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문화에서는 복수를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그것을 비도덕적 행위로 간주한다. 이처럼 직감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유동적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공리주의와 직감주의 모두를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공리주의는 윤리적 판단을 체계화하고 객관화하려는 장점이 있지만, 인간의 내면적 도덕 감수성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 반대로 직감주의는 인간 본연의 도덕적 직관을 존중하지만, 그 직관이 반드시 옳거나 보편적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윤리적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이 두 관점을 균형 있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의료윤리는 공리주의와 직감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충돌하는 분야 중 하나다. 특히 '장기이식'과 '안락사' 문제는 이 두 윤리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한 명의 건강한 사람을 희생시켜 다섯 명의 장기 이식 대기자를 살릴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 관점에서는 "다섯 명을 살리는 것이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전체 행복을 더 크게 만든다"고 주장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고, 그들의 가족과 사회 역시 더 큰 행복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론을 엄격히 적용하면, 한 명을 강제로 희생시키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 결론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아무리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다 해도, 무고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직감적으로 느낀다. 여기서 직감주의는 "인간의 생명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깊은 도덕적 직관을 대변한다. 인간은 단순한 행복의 수치로 환산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타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안락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자 할 때, 공리주의자는 "고통을 줄이고 남은 가족들의 심리적 고통까지 완화한다면, 이는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결정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직감주의적 입장에서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이유로 어떤 경우에도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아무리 당사자가 원하고 사회적 편익이 크다 하더라도, '죽음을 선택하게 돕는' 행위 자체에 대한 깊은 도덕적 불편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리주의가 때로는 인간의 본능적 도덕 감각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결과만을 강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직감주의가 항상 명확한 해답을 주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여러 직감이 서로 충돌할 때(예: 생명 존중 vs 고통 경감) 우리는 어떤 직감을 우선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결국 현대 사회는 공리주의적 합리성과 직감주의적 인간 존엄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야 한다. 의료윤리, 법, 정치 등 실질적 제도 설계에서도 이 두 관점을 모두 고려하는 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단순한 수치나 직감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리주의와 직감주의의 논쟁은 단순히 과거의 철학적 논쟁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삶 곳곳에서 중요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으며, 두 입장은 서로 보완하면서 우리의 도덕적 사고를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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