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신 진찰이라고 하면 프로이트의 상담 장면을 쉽게 떠올리곤 한다. 파란 의자에 누운 환자와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이트의 모습 말이다. 무의식을 알아내야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그의 정신분석학 이론은 오늘날 심리학의 토대가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심리 상담을 통해 나의 행동 동기가 무엇인지, 그 근원이 되는 과거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과정을 무척이나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과거를 뒤져서 잘못을 찾아내는 방식은 때때로 우리를 부정적인 기억에만 매몰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심리학 용어로는 ‘사후 가정사고(counterfactual thinking)’라고 한다. "그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 같지 않았을 텐데..."라는 식의 생각 말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본인의 마음이 힘든 이유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정서적 결핍을 준 부모, 소외되었던 학창 시절, 궁핍한 경제 상황 등 무의식까지 파고들지 않아도 의식 수준에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왜 프로이트는 무의식 이론을 강조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그가 살던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프로이트가 활동하던 시기는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유럽은 겉으로는 신분제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급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대였다. 봉건과 근대가 공존하고 있었고, 개인의 노력만으로 인생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기보다는 억압하던 분위기 속에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의사에게 감정을 털어놓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환자의 신체 증상이 호전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엔 정신과 약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의학적 한계 앞에서, 프로이트는 정신과 의사로서 뭐라도 해보자는 절박한 마음으로 환자의 내면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약물 처방만으로도 우울증이나 공황장애가 호전되는 오늘날에는, 그렇게까지 환자의 내면 깊숙이 들어갈 필요가 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트라우마는 ‘해결’할 수 없다. 긍정심리학으로 유명한 마틴 셀리그만(Martin E. P. Seligman)은 어린 시절의 사건들이 훗날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대해, 이를 뒷받침할 만한 타당한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계속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고, 자기 연민에 빠져 괴로워하는 걸까?
그건 트라우마가 가진 ‘서사성’ 때문이다. 트라우마의 비극적인 서사는 자기 연민을 부르고, 우리는 그 연민 속에서 삶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경향을 갖게 된다. 살다 보면 자기 연민 서사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들은 과거만 아니라 현재의 문제조차 외부 탓으로 돌리며, 피해자 서사에 머문다. 나는 피해자고, 타인은 가해자라는 프레임 안에서,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조차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타인의 잘못이라고 믿었던 일에 대해 그 사람에게서 눈물 어린 사과를 받는다면, 내가 받았던 상처가 사라질까? 상대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 자기 연민 서사의 틀을 깨지 못한 사람에게는 사과조차 또 하나의 상처 레퍼토리에 불과할 뿐이다. "이미 내 인생은 망가졌고,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고, 여전히 자신을 불쌍하고 안타까운 피해자로 규정짓는다. 결국 과거라는 실체 없는 상대와 섀도우 복싱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연민의 비극적 서사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자기연민을 ‘느끼는 것’과 ‘머무르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감정 자체를 억누를 필요는 없다. 상처받은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은 치유의 시작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감정에 머물러 스스로를 피해자로만 규정할 때 발생한다. 자기연민이 길어질수록 세상과 자신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며, 모든 사건을 ‘나에게 불공평하게 일어난 일’로 해석하게 된다. 그러므로 감정을 인식하되, 그것에 붙잡히지 않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둘째, '내러티브'를 재구성해야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경험을 이야기로 조직한다. 이때 선택하는 서사의 형태가 중요하다. 과거의 고통을 실패의 이야기로만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성장을 위한 여정으로 해석할 것인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다시 써야 한다. "나는 상처받았다"에서 "나는 상처를 통해 더 강해졌다"로 서사를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셋째, 관점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연민에 빠지면 시야가 극도로 좁아진다. 나의 고통만이 가장 중요해지고, 타인의 고통이나 세상의 다양한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의식적으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며 세상의 넓이를 체감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자신만의 고통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면, 자기연민의 무게도 자연스럽게 가벼워진다.
넷째, 작은 행동이라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기연민은 무력감을 강화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믿음이 행동을 마비시킨다. 이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필요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일기 쓰기, 운동하기 같은 사소한 행동이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삶에 대한 통제감을 되찾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비판하기보다는 따뜻하게 격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연민을 극복하려다 보면 또 다른 함정에 빠지기 쉽다. ‘나는 왜 이 감정에 빠지는가’ 하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자기 자신에게 친구처럼 따뜻하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괜찮아, 누구나 그럴 수 있어"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이 오히려 자기연민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
결국 자기연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감정을 부정하거나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한때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새롭게 써 내려갈 수 있는 힘 역시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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